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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남매 결혼축의금 안받으니 축복이 쏟아지더군요”
글 | 유인경·사진 | 김세구기자경향신문


ㆍ아침편지 고도원의 오랜 꿈

5월은 가장 아름다운 달이면서도 가장 잔인한 달이기도 하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에다 부부의날까지 기념일도 많고 결혼식도 수두룩해 불경기에 지갑은 썰렁하기만 하다. 기념일의 선물은 생략해도 결혼식에 빈손으로 가기는 어려운 일. 하지만 ‘고도원의 아침편지’로 매일 아침 200만명에게 ‘잘 사는 법’을 이야기하는 아침편지문화재단 고도원 이사장(57)은 남매의 결혼식을 모두 축의금을 받지 않고 치렀단다. 그리고 그것이 젊은 시절, 그들 부부의 꿈이기도 했단다. 청첩장이 고지서처럼 여겨지는 요즘, 일상의 작은 혁명을 시도한 그는 자신만의 꿈이 아니라 수백만명의 꿈을 담은 60만평 규모의 명상센터를 구상, 올해 안에 첫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꿈너머 꿈을 꾸는 사람, 고도원씨를 만나 꿈을 이루는 법을 들어봤다.

축의금을 안받자 쏟아지는 축복과 덕담들

- 아들, 딸 모두 결혼식에 청첩장도 안 돌리고 축의금을 받지 않았다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전기밥솥 하나로 시작한 저희 부부의 신혼생활은 참 가난했습니다. 당시 1000원 정도의 축의금조차 부담스러운 형편이었죠. 어느날, 아끼는 후배의 결혼식에 갔더니 ‘축의금을 받지 않습니다’라고 쓰여 있더군요. 아내가 그때 굉장히 감동했는지 ‘이 담에 우리 애들 결혼식때 축의금을 받지 말자’고 하더군요. 지난해 10월에 결혼한 아들 대우(27)에게는 ‘남자의 진정한 성공이, 사랑의 완성이 뭐냐’고 물었어요. 그리고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기로 결심했으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어떤 조건에서도 변하지 않고 그를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일러줬지요. 2005년에 결혼한 딸 새나 역시 축의금 대신 아침편지 가족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딸의 결혼을 축하하며 남겨준 ‘진심이 담긴’ 글을 책으로 묶어 선물로 건넸습니다. 축의금대신 넘치는 축복을 받았어요.”

- 아무리 뜻이 좋다고 해도 사돈, 특히 따님의 시댁까지 동참하긴 힘들었을텐데요.

“쉽지 않았죠. 특히 사위는 지방의 의사 집안인데 그동안 투자(?)를 많이 하신 분이랍니다. 우선 딸을 설득했죠. ‘아빠가 황당한 꿈을 많이 꾸지만 그걸 현실로 이루게 하는 힘이 네 엄마다. 아빠가 이제 엄마의 꿈을 이뤄주고 싶다’고요. 같은 이야기를 사돈댁에 하니까 고맙게 받아들여주셨고 막상 결혼식이 끝나고 나니 사돈댁에서는 너무나 의미 있는 식을 올렸다며 기뻐하셨다고 해 마음이 놓였습니다.”

- 가난한 젊은 시절에야 그런 꿈을 꿀 수 있지만 결혼식은 가장 현실적인 부분인데 부인이 끝까지 청첩장, 축의금 없는 결혼식을 고집하셨다니 뜻밖입니다.

“팔불출 같지만 그래서 아내가 참 고맙고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생활 속의 위대함을 실천한 거 아닙니까. 제가 세도가들의 결혼식장에 많이 가봤지만 축의금 봉투 들고 정류장처럼 줄을 서있는 모습이 별로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봉투 하나 내밀고 눈도장 찍으면 그게 끝이더군요. 또 축의금 많이 들어왔다고, 하객이 많다고 결혼생활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제가 ‘아침편지’를 통해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인데 말이나 글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모두 아내 덕분입니다. 축의금을 안받다보니 결혼식도 완전히 ‘다이어트’를 했죠. 예단이며 드레스도 그렇고 일가친척만 모셔다 한 조촐한 예식에 음식도 직접 장만했거든요. 토요일에 했는데 마침 교회에 꽃도 다 준비되어 있어 조금만 손을 보면 되어서 아들은 400만원 정도 들었어요. 제 생각에 제일 빨리 바꿔야 할 것이 허례허식으로 가득 차서 마치 쇼처럼 진행하는 결혼문화입니다. 제가 먼저 실천했는데 결과적으로 작은 파문을 일으켰나 봅니다.”

- 이제 아침편지 덕분에 고도원이란 이름은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개인을 비롯, 각 단체에서도 ‘아무개 편지’란 형식의 유사 편지를 많이 보내더군요.

“책읽는 집안에서 태어나 어쩌다 인생 중반기 이후에 소박하게 시작한 일이 매일 200만명의 독자에게 배달되니 400만개의 눈동자와 마주치는 엄청난 일을 하게 됐습니다. 때론 산등성이 10부 능선에서 홀로 서 있는 듯한 느낌도 들고 너무 과도한 기대와 존경까지 받는 것 같아 두렵기도 해요. 그런 신뢰가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기에 더욱 명상과 기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매일 ‘자알~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만 아직도 잘 사는 게 뭔가 매일 고민합니다. 최근엔 ‘짝퉁’ 편지도 대거 등장했는데 책읽기를 일상화한다는 점에서는 바람직하다고 봐요. 사람들이 그런 편지글을 통해 독서와 사색을 한 뼘이라도 넓힐 수 있는 역할을 하고 트렌드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보람을 느낍니다. 다만 글을 따와 인용하고 관련한 글을 달고 e메일로 보내는 것은 제가 개발한 발명품이자 비즈니스 모델인데 너무 아무렇게나 흉내내는 것 같아 약간 걱정스럽기도 해요.”

- 매일 휴일도 없이 시의적절한 글을 찾아내 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텐데요. 대체 언제 어떻게 그 많은 책을 읽습니까.

“2001년 8월1일 첫 메일을 발송해 어느덧 8년이 흘렀군요. 사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시의적절한 좋은 글귀를 뽑아내는 것은 머리에 쥐가 나는 일이죠. 대통령 비서관 시절에 딱딱한 연설문만 쓰다가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바늘 구멍 하나 내자고 시작했는데 그게 다시 머리에 쥐나는 생업이 됐습니다. 다만 워낙 많은 책을 읽어와서 지금 당장 책 읽는 일을 중단하더라도 4~5년은 버틸 독서카드가 있습니다. 저의 보물 1호이고 그건 시골교회 목회자였던 선친(고은식 목사)이 남겨주신 유산입니다. 어릴 땐 매맞아가며 책을 읽었어요. ‘밑줄 검사’도 받았어요. 책에 밑줄이 안 그어져 있으면 회초리를 꺾어오게 해서 종아리를 때리셨습니다. 독서가이자 장서가인 아버지 밑에서 키운 ‘밑줄 긋는 습관’이 독서카드를 만들어냈어요.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와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는 밑줄 그어가며 수십번을 읽었던 책입니다. 아득해질 때마다 그 책을 펼치면 아이디어가 샘솟았어요.”

- 김대중 대통령시절 청와대 대통령 연설 비서관으로 일할 때도 결국 글을 쓰는 일 아니었나요.

“그건 스트레스 정도가 아니라 사람 죽이는 일이었죠. 토씨 하나에 피가 마르고 누군가 ‘이번 연설문 어떻더라’란 말에 천당과 지옥을 오갔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누굽니까. 워낙 꼼꼼, 철두철미하고 명석하신 데다 엄청난 기억력의 소유자이고 대단한 문필가죠. 게다가 본인의 탁월한 사고에서 나오는 생각을 깨알 같은 글자로 빨리 써내는 속기사이기도 합니다. 그런 분을 위한 연설문의 초안을 5년간 쓰다 보니 긴장감과 스트레스로 몸이 완전히 망가지더군요. 고개가 안돌아가고 어깨, 손 등에도 마비증세가 나타나 안먹어 본 약이 없습니다. 이 연설문만 쓰고 3시간만이라도 머리 상태가 명징했으면 하는 바람에 온갖 약에만 의지하다 보니 몸은 굳어가고 머리는 터질 것 같았어요. 머리가 터지기 직전에 나를 구하기 위한 처방으로 시작한 것이 아침편지죠. 부드럽게 위로하듯 친구에게 전하는 글을 쓰면서 내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당시엔 청와대 1급 비서관이 자기 이름을 걸고 엉뚱한 일을 한다고 오해도 받았고 공식 회의에서도 거론되어 해직위기도 겪었어요. 그때 절 이해해 주신 분이 김대중 대통령입니다. 그 분은 제가 아침편지를 통해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생각의 높낮이를 조절한다는 것을 아셨거든요. 임기 말 후반기에는 “오늘은 아침편지 회원이 몇명으로 늘었나’를 매일 물어볼 정도로 따뜻한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배신하는 이들을 보고 정치의 꿈을 접었다

- 청와대 권력의 핵심부에서 일하며 대통령에게서 인정도 받았으면 자연스럽게 권력의지를 갖게 될텐데 왜 정치를 멀리했나요.

“정치부 기자로 오래 근무하다보면 상당수가 권력에 대한 호기심과 의지를 갖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5년간 대통령 연설비서관을 한 것이 참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건강은 잃었지만 대통령 연설문을 쓰기 위해서는 진짜 대통령은 아니지만 대통령의 시각과 입장에서 세상을 봐야 하기 때문에 ‘진짜 대통령’의 심기도 살펴야 하고 대중들의 마음도 파악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정치인들의 변심을 목도했죠. 그렇게 가까웠던 이들이 한순간 무서운 적이 되고 뒤통수를 치는 과정을 보면서 두렵다는 차원이 아니라 ‘이 판에 들어가면 사람버리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곁과 속이 다른 전략으로 무장하고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선 권력의지를 깨끗하게 접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믿는 나와 아침편지 회원들과의 관계가 유권자의 표로 계산되는 사이여선 안된다는 생각에 2003년 2월25일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날 곧바로 한 달 동안 배낭여행을 떠났습니다. 청와대 5년 근무에 훈장까지 받았으니 장관 혹은 차관이라도 시켜주거나 국회의원 배지를 기대할 수도 있었겠지만 제가 먼저 마음을 접은 거죠. 한 달간의 유럽 배낭여행을 통해 인생의 밑그림을 다시 그리게 되었습니다.”

“일어설 수 있는 용기만 있으면 막장이라도 희망은 존재”



- 정치를 하고 권력의지를 갖는 게 나쁜 겁니까. 그런데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청와대에 들어가려고 안달입니까.

“(청와대)속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을 더욱 가치있게 만들겠다는 소명의식과 사명감은 필요합니다. 웅지를 가진 사람도 있어야 나라가 발전하죠. 그런 지도자의 역량과 비전을 갖춘 사람, 버락 오바마처럼 젊은 시절부터 자기 삶을 정돈해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정치를 목숨걸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과거에 엉망진창으로 살아온 사람이 불쑥 정치판에 뛰어든다면 다른 이들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을까요.”

- e메일로 행복을 배달하는 일도 처음엔 얼마나 갈까 황당했는데 더 황당한 꿈을 키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기록이 기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2003년 9월 아침편지에 제 꿈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깊은 산속 옹달샘’이라는 이름의 명상센터를 짓겠다는 내용이었어요. 아내조차 황당한 얘기를 자꾸 하냐며 반신반의했던 꿈이 현실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셴부룬 가든 같은 규모의 땅에 명상센터를 짓고 싶다는 그 꿈은 2025년 완공을 목표로 충주시 60만평 부지에 건립되는 명상센터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2025년에 완공된다니까 다들 의아해하고 황당한 꿈을 꾼다고 하더군요. 사람들은 꿈을 이야기하면서 내일 당장 떡이 나오고 그 떡을 꼭 자신이 먹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황당한 꿈일수록 차근차근 하나씩 이뤄져 갑니다. 저 역시 2025년까지 건강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은 있지만 20년, 30년 후를 말하는 것은 꼭 제가 하겠다는 것이 아니거든요. 60만평 중 7만평을 먼저 우리가 구입해 계획서를 세웠고 1만평의 개발이 올해 완성됩니다. 얼마전에 아침편지 후원인클럽인 드림서포터즈에서 숲속음악회를 개최했는데 8300여명이 모였어요. 자원봉사자 200여명이 도와서 주차도 일사불란하게 하고 쓰레기 하나 안 남기고 깨끗하고 아름답게 끝났어요. 일종의 작은 기적이죠. 각종 프로그램도 줄서서 문여는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명상학교, 건축학교, 부엉이학교, 단식학교, 청소년수련원 등 병이 나기 전에 이곳을 찾아 잠깐만 머물러도 몸과 마음이 맑아지고 기운이 샘솟는 공간을 만들 계획입니다. 일상을 초월한 도인을 만드는 신비로운 공간이 아니라 평범한 이들이 와서 편안하게 머물면서도 새로운 영혼을 발견하는 그런 곳이 될 겁니다. 조경학자이고 야생화전문가인 정정수 화백이 조경에 관한 총예술감독을 맡고 있는데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그 분의 허락을 받아야만 심거나 옮겨지게 했어요. 그래서 25년 후엔 유례없는 각종 풀과 나무가 무성한 꿈의 동산이 될 것입니다. 그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집니다.”

- 그렇게 수백억원이 투자되는 큰 사업을 이끄는 분에게는 자연스럽게 이권에 개입될 소지가 있을텐데요.

“서번트 리더십이라고 할까요. 제가 먼저 내려놓으니 다들 믿고 따라 주더군요. 이권에 눈이 멀거나 대가를 바라고 오는 이들은 칼같이 잘랐습니다. 돈 냄새가 나지 않는 맑은 공간으로 만들고 독보적인 시스템으로 운영·유지되는 곳이 될 겁니다. 사실 지인들에게 e메일로 책에서 읽은 좋은 문장들을 소개할 때만 해도 아침편지가 이렇게 커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거든요. 이숙영씨가 진행하는 SBS FM 프로그램에서 조간브리핑을 하면서 마지막에 좋은 글을 소개하는 ‘고도원기자의 오늘의 어록’을 한 게 모든 것의 시초였습니다. 일종의 취미나 봉사 차원에서 시작했는데 마음의 공동체가 되고 자꾸 저를 올려놓는데 기도, 명상으로 제가 낮아지려 애씁니다. 나이도 지금이 적당한 것 같습니다. 너무 젊어도 혈기방장하고 더 나이들면 기운이 빠져 일을 제대로 못할텐데 50대인 지금이 딱 좋아요. 뜻이 좋고 사람들을 잘 이끌면 좋은 기운은 널리 퍼집니다. 우리 행사 가운데 몽골에서 말타기 여행 프로그램이 있어요. 울란바토르에서 초원길을 따라 12시간 이상 가서 열흘 동안 그저 말만 타고 오는 프로그램입니다. 처음엔 단 한 번도 말을 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날에 광활한 초원에서 칭기즈칸처럼 말을 타면서 전혀 새로운 자신을 발견해요. 인생이 바뀌고 비전이 바뀌는 체험을 했다는 이들이 자기 아이를 보내고 이웃에도 권해서 벌써 1000여명이 참여했어요. 좋은 기운이 모이면 여행도 디자인에 따라 예술이 되더군요. 의용군을 모아서 정예군을 만드는 과정인데 그때도 서번트리더십이 필요합니다. 늘 받드는 마음으로 회원들을 만납니다.”

- 마음 공부시키고 불우이웃에게 집도 지어주고 명상센터 준비하고… 굉장한 힐러 역할을 하면서 정작 ‘고도원 아저씨’로 불리고 싶다고 했는데 너무 소박하게 포장하는 전략 아닙니까.

“아저씨란 호칭은 전략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세상 여기저기를 다녔는데 어느 곳에서 배울 것이 많아 감동하다가도 돌아서면 확 깨는 곳이 많더군요. 또 어떤 리더를 너무 신격화해도 실망감이 커집니다. 그 어떤 리더도 화내고 밥먹고 웃고 똥싸는 존재인데 그저 한걸음 앞서갈 뿐이죠. 때론 200만명의 아침편지 독자들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습니다. 때론 너무 큰 기대를 갖고 보는 이들도 있는데 그때마다 ‘난 천사가 아닙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회원들은 서로 이름 뒤에 님이란 호칭으로 부르는데 고도원님이나 아저씨란 호칭이 제일 편합니다. 더 나이들면 고도원 할아버지로 불려도 좋고요.”

- 희망전도사, 행복전파사 역할을 하지만 요즘 우리 사회에 희망이 너무 없는 듯합니다.

“어떤 시대에도 희망은 존재합니다. 그 암담한 한국전쟁때도, 군부독재시대에도 다 죽을 것 같았지만, 다 끝난 막장이라고 생각했지만 더러는 사라졌어도 대부분은 살아 남지 않았습니까. 지난 9일 타계한 장영희 교수가 ‘신(神)은 사람이 일어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며 희망을 잃지 말라는 말을 했죠. 누가 옆에서 부축해줘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의지로, 내 발로 일어서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끈질긴 생명력과 희망을 가지면 내면이 깊어지고 새 세상을 보게 되거든요. 요즘 경제난으로 월급이 줄어든 이들도 있고 실직한 이들도 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지 않습니까. 반이라도 탈 월급이 있고, 잠시 쉰 후에 다른 일을 찾지 말라는 법은 또 어디 있습니까.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가 바로 희망입니다. 넘어지면 다수는 무너지고 때론 자살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죠. 하지만 희망을 갖고 다시 일어서면 또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희망은 남이 주는 게 아니라 내가 발견하는 거죠.”

- 가장 보람을 느낄 땐 언제입니까.

“대부분 저를 찾는 사람들은 기쁨에 넘치는 이들이 아니라 실의에 차서 자살을 생각하며 다가오는 힘겨운 분들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공감한 후에 구체적인 사람들을 생각하며 글을 썼을 때 딱 그 사람이 ‘오늘 글, 정말 가슴에 와닿았다’고 댓글을 단 것을 확인할 때는 거의 희열을 느낍니다. 그야말로 통하였구나란 감탄사가 나오죠.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것이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200만명과 소통하고 그게 정치인의 표가 아니라 사랑이니 전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요….”

▲고도원은 누구인가

5년간 대통령 연설 담당
아침편지 배달부로 명성


전북 전주에서 1952년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그 역시 목사가 되려고 연세대 신학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유신시절 대학 학보사 필화 사건으로 제적당하고 수배와 강제징집을 거치면서 목회자의 길이 막혔다. 백수생활을 하다 동네 문방구를 차리려고 준비하면서 사기를 당하기도 했고 친구 도움으로 웨딩드레스 숍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 후 잡지사 ‘뿌리깊은 나무’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필력을 인정받아 83년에 중앙일보에 입사한다. 98년부터 5년간 청와대 연설 담당 비서관으로 일하며 2003년 퇴임할 땐 황조근정훈장도 받았다.

대통령 연설문을 쓰는 중압감을 이겨내기 위해 매일 아침 좋은 글귀 밑에 자신의 생각을 짧게 담아 e메일을 보내는 ‘고도원의 아침편지’로 2001년 8월부터 회원을 모아 현재는 연 20억~30억원의 후원금으로 꾸려가는 아침편지문화재단의 이사장이다. 대통령 연설문을 쓰며 마음으로는 이미 대통령도 해봤기에 권력엔 욕심이 없고 사람들의 영혼을 풍요롭게, 행복하게 하는 것이 꿈이다. 2025년 완공을 예정으로 충청도에 60만평의 명상센터인 ‘깊은산속 옹달샘’을 추진 중이다.

<글 | 유인경·사진 | 김세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