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나라의 러시아 연해주 답사기
   
 


연해주의 최대 도시 블라디보스톡을 돌아보고
속초로 떠날 배를 타기 위해 처음 도착했던 자루비노항으로 가는 것을 끝으로
답사팀의 7박8일 일정의 연해주 답사는 막을 내렸다.

우정마을이 있던 우스리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길에
라즈돌로니에 기차역에 잠시 들렀다. 고려인 강제 이주가 시작된
비극의 현장을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막감만이 감돌던
기차역을 떠나 블라디보스톡에 도착, '신한촌(新韓村)도 둘러보았다.
강제 이주를 당하기 전 번성했던 고려인의 집성촌이었으나
이제는 단 한 집도 남아있지 않고 기념비만이 혼자
외로이 그 곳을 지키고 있었다.

옛 발해의 기상이 웅비(雄飛)했던 고토(古土).
땅도 그대로, 그 위에 부는 바람도 그대로인데
발해인의 그 웅비는 저 멀리 사라져 버리고, 갈라지고 찢겨진
아프고도 슬픈 역사가 그 고토 위에 켜켜이
새겨져 있는 듯했다. 가슴이 아렸다.

그런데, 갈라지고 찢겨진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 일이 블라디보스톡에서 일어났다.
동평의 강윤구 간사가 예약한 '평양식당'이란 북한 음식점에서였다.

북한 사람이 직접 만드는 맛깔스런 북한 음식과 평양 냉면,
음식을 나르는 북한 미녀들의 '반갑습니다' 노래 공연을 정말
'반가운' 마음으로 즐기면서도, 여전히 마음의 빗장을 완전히
열지 못하는'분단의 벽'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우리는 하나이면서 둘이었고, 둘이면서 하나였다.

바로 그때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마음의 빗장'이
살짝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식사를 끝마치고, 북한 미녀들과
인사를 나눈 후 밖으로 나오는데, 평양식당 주인인 북한동포 김성옥님이
고도원님을 문밖까지 배웅해주었다. 그리고는 명함과
이메일 주소를 건네주며 특유의 사근사근한
북한 사투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고도원선생님, 전 세계 사람들이 다 받아보는
그 고도원의 아침편지를 저에게도 보내주십시오"

재작년 고도원님과 함께 평양을 두 번이나 방문했을 때도
뚫리지 않았던 북한의 이메일이, 이곳 블라디보스톡 평양식당에서
처음으로 뚫린 것이었다. 고도원님의 얼굴에 놀라움과 함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2001년에 시작되어 6년 동안
매일 아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편지를 보내면서 어쩌면 지금이
가장 의미있는, 가장 감격적인 순간이 아니었을까 하고
눈물의 의미를 감히 짐작해 보았다.

노블하우스의 류재관 대표님이 여정중에 우연히 만나 식사를 대접한,
"통일되면 남한에서 돈벌고 싶다"던 북한 외화벌이 노동자들과의
만남도 그렇고, 평양식당의 김성옥님과의 의미있는 만남도 그렇고
이 곳이 연해주 땅이였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러시아에 나와 있는 북한 사람들뿐 아니라
실제 북한에 살고 있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아침편지가 마음의 비타민으로
거리낌없이 배달될 수 있기를 꿈너머꿈으로 가지게 된
의미있는 러시아 연해주 답사 여행.

이 의미있는 연해주 답사를 떠나기 전날,
짐을 챙기면서 여행 가방에 유일하게 챙겨넣은 책이 하나 있었다.
바로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였다. 17시간 이상 배를 타고
오며 가며 읽을 요량으로 넣었던 그 책 속에서 여행 초반,
내 가슴을 치는 말을 발견했다.

"고난에 뜻이 있다."

사실 이 말은 책에서 본 것 보다 훨씬 오래 전
어떤 일을 계기로 고도원님께 듣고는 어느 순간 내 삶의 '신조'가 된
'모든 것에는 뜻이 있다.'라는 말과 같은 맥락의 것이어서
더욱 가슴을 쳤는지도 모르겠다.

성공이든, 실패든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말 그대로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에는 다 뜻이 있다'는
이 짧은 문장이 가져다 준 위로와 평안이 내 삶 전반에 걸쳐
얼마나 큰 평화를 만들어 주었는지 모른다.

어떤 연유였는진 모르겠지만,
이번 러시아 연해주의 끝이 보이지 않는 땅과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특히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고통과 설움과 분노와
시대 상황 안에서의 무력함으로 전 생애를 살아온 중앙아시아에서부터
러시아 연해주까지의 고려인들을 보면서 '고난에 뜻이 있다'는
이 말이 더더욱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것이
140년 동안의 고난의 역사...
그 역사가 만들어 남긴 상처가 칼로 새겨진 듯
얼굴 모습에, 성격에, 문화에, 언어에, 생활 형편에, 하는 일에
깊이 박혀있는 고려인들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고 절망하는 나에게
그것만 보지 말고, 그것만 생각하지 말고, 더 크게 생각하고 더 멀리
내다보라고 계속해서 나를 일깨워주는 것 같았다.

「고난은 그것을 견뎌내는 사람에게는 옥을 닦는 돌 같은 것이나,
거기 져버리는 사람에게는 망하게 하는 재난이 되는 것」이라는 책 속의
말처럼, 140년전 러시아행을 결심한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가
견뎌낸 고난이 '옥을 닦는 돌'이 되었기에 그 고통속에서도, 그 설움과
압박속에서도 모든 것을 이겨내고 '바위에 나는 풀'처럼 생명력있게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결국 고난에 지지 않은 그 끈질긴 살아냄이
다시금 이 러시아의 연해주에 '재이주와 정착'이라는 희망의 꽃을 피우고,
동북아 평화연대라는 의미있는 단체를 움직이는 정신적 힘을 만들어내고,
드디어 러시아 연해주를 찾은 우리에게 '마음의 영토'처럼
꼭 봐야 할 것들을 보여준 것은 아닌지...

답사기 첫번째에 밝힌 '뭔가 다른 이번 답사의 섭리'가
바로 그 고난 가운데 있는 뜻을 발견하고, 우리가 그냥 지나치지 않도록
시종일관 일깨워주고 있지는 않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든 말이어서
그리도 내 가슴을 치고 떠나지 않았던가보다.

섭리를 발견케하고
'고난의 뜻'을 깨닫게 해준
이번 러시아 연해주 답사는 답사로 끝이 아니다.

국가와 정부의 힘만으로, 또 동평같은 NGO단체의 열정만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일, 그 크고 의미있는 일을 위해 '고도원의 아침편지'가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이번 답사를 통해 발견했고,
더욱 확고해졌다. '마음의 영토'를 넓히는 작업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의 가슴 속에 옛 발해의 땅,
연해주가 이미 마음의 영토로 자리잡았기를 희망하며...



-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침지기 윤나라 -
- 글,사진/ 아침지기 윤나라 실장




이상설 유허비.
이상설선생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사로 참석하여 일본의 국권침탈에 대해 알리고,
이후 블리디보스톡을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17년, 연해주 우스리스크에서 서거하셨다.



누가 먼저라 할것 없이
이상설선생 유허비 주변 휴지를 줍고 있는 답사팀.



옛 발해의 성터(내성).
1,0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곳에서 수많은 발해의 유적이 발견된다고 한다.



발해역사와 발해성터에 대한 김현동대표(가운데 검정옷)의 설명을
아침지기 박진희실장(왼쪽에서 두번째)이 꼼꼼하게 메모하고 있다.



발해 절터를 찾아서...
나무와 수풀만 무성히 자라나 있다.




발해 절터에서 발견된 4개의 주춧돌.



발해 유적으로 추정되는 천년된 거북이.
2개의 같은 거북이가 발견되었는데 하나는 이 곳 시민공원에,
다른 하나는 하바로프스크에 전시되어 있다.



1800만평 순얏센 농장 중심에 자리잡은 순얏센센터 '보금자리'에 도착한 답사팀.
이곳 농장과 센터는 대한주택건설협회(당시 회장 박길훈님)에서 동평에 기증한 것이다.



한국 젊은 청년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하여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맨 오른쪽부터 김윤진, 전유리, 구태희, 강윤구 간사.



이 곳 '보금자리'에서는 고려인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학교도 열고 있다.
10~15세 학생 19명이 고려인 역사와 농업, 한국어 교육을 받는다.



종이접기.
10~15세 19명의 어린이들이 자원봉사선생님들과 종이접기 수업을 하고 있다.



"잘 만들었죠?"
한 고려인 아이가 자신이 만든 작품을 자랑하고 있다.



순얏센 센터 앞마당.
소박하지만 자연과 잘 어우러져 편안한 공간이다.



순얏센 센터 뒤편으로 나 있는 산책로.
나무와 풀과 흙길이 '걷기명상'을 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꿈너머꿈' 강연.
동평의 스탭들과 자원봉사자들을 위해 예정에 없던
고도원님의 특별 강연이 즉석에서 이루어졌다.



"꿈을 이루면 행복해지지만, 꿈너머꿈을 가지면 위대해집니다."
고도원님의 얼굴에 밝은 에너지가 넘친다.



강연 후 간담회에서 노블하우스의 류재관님(가운데)이
동평 김현동님(검정색 상의)의 손을 꼭 잡고, 그동안의 인연과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며 감사를 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