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키즈스탄에서의 첫날,
뗄만이라는 시골 마을에 세워진 '뗄만 학교'를 방문하게 됐다.
가는 길이 시골 고향에 가는 듯 정겨웠고, 마을 너머 멀리 보이는 만년설 산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학교의 모습은 내가 어렸을 적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보았던 학교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무뚝뚝한 건물 몇 채가 한 곳에 모여 서있는 모습이라든가, 작으면서 삐그덕거리는 책상과 걸상이 너무도 비슷했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나무로 지어진 학교였는데, 이곳은 시멘트로 지어진 점이 다를 뿐 그 열악함은 거의 똑같았다.

우리를 반기는 교장선생님의 인상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웃음기라고는 한 점 없이 화가 난 듯, 심술이 난 듯, 심지어는 험악해보이기까지 했다.
좀 무서운 인상이었지만 구석구석 안내하며 학교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에서 인자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중엔 그 무서운 인상이 험악한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랜 수심에서 나온 것은 아닌가 하는
짐작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이 학교를 방문하게 된 목적은 기아대책의 지원으로 1년 전에 개설한 '장애인들을 위한 교실'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안내해준 장애아 교실을 보기 위해 들어가는데, 교실 입구 게시판에 장애 학생들이
그려놓은 그림들이 정성스럽게 걸려있었다. 마치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특별히 준비해놓은
조그만 작품전시회를 보는 것 같았다.

게시판에 붙여놓은 그림들 중에 내 시선을 사로잡는 그림이 있었다.
한때 화가의 꿈을 키우며 대학에서 그림 공부를 했던 미술학도의 눈으로 보기에도 장애를 가진
아이의 작품치고는 대단한 그림이라고 칭찬할 만한 것이었다. 나는 그 그림들을 한참동안 주의깊게 관찰해 보았다.
그리기 힘든 동물들을 주제로 그려놓은 그림들인데, 관찰력과 뎃생력이 보통 수준을 넘어서는,
이야기 거리가 아주 많은 그림들이었다. 웬지 끌려서 나도 모르게 카메라 셔터를 연방 눌러댔다.

우연이었을까?
학교를 빠져나와 이 장애 교실에 다니는 학생의 집을 한곳 방문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만난 학생이 바로 그 그림의 주인공이었다.

일림.
웬지 모를 설레임과 반가운 마음, 약간의 호기심이 내 가슴을 조금 울렁이게 했다.
여느 아이들처럼 뛰어놀고 싶었는지 공차기 하는 아이들 틈에 끼어 골키퍼 역할을 하고 있던 '일림'을
그렇게 만났다. 일림은 16살, 한국나이로는 17살의 소년이었다.
태어날때부터 소아마비를 앓아 두 다리가 모두 불편한 아이였다.
조금 다행인 것은 많이 불편하고 험해 보이지만 혼자서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증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나마 움직일 수 있었기에 그 아이의 그림이 정물화에 국한되지 않고,
동물이 주제가 되는 풍경화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림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웃음을 잃어버린 아이 일림은 축구도 하고 싶고, 많은 곳을 힘들지 않게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2년반 전 숨진 아버지가 장애를 가진 아들이 창피해 학교도 보내지 않아 배움의 길을 잃었고,
더구나 돈이 없어 병원 문턱에도 가 본적이 없으니 웃음기를 잃은 채 축구의 꿈,
화가의 꿈을 안으로 접어 가슴 깊숙히 품고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때마침 학교에 장애 교실이 생겨 어머니가 일림을 학교에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혼자서 네 아이를 기르던 어머니가 일림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는데 눈물이 반, 한숨이 반이다.
일림의 몸은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상태이고, 기왕에 수술을 하려면 좀더 어린 나이에 하루라도
빨리 해야 좋은데 돈이 없어서 좋은 수술시기를 놓쳐가고 있는 것이 내내 한이 되는 모양이었다.

"선천성 소아마비이긴 하지만, 수술을 하고 재활 치료를 꾸준히 받으면 정상적인 아이들과 비슷한 상태까지
호전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듣고 이곳 저곳 뛰어보았지만 결국엔 300달러라는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해
기회를 놓쳐버리고 있어요."
띄엄띄엄 말을 하고 눈물을 닦는 일림 어머니의 허벅지를 말없이
손으로 토닥거려 드렸다. 그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내 가슴이 다시 아려왔다.

그 순간 일림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본래 계획에 없었지만, 우리 일행과 동행한 비쉬켁의 한인교회 김옥렬목사께서, 그 자리에서 바로 일림의
수술비 전액과 이후 치료비 지원을 약속하고 가능한 이른 시간안에 수술 날짜를 잡도록 했던 것이다.
즉석에서 이루어진 약속이 우리에게는 작은 '선행'일지 모르나, 일림과 그 어머니에게는
꿈에도 그리던 '기적'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수심에 가득했던 일림과 일림의 어머니 얼굴에서 조그맣게 피어오르는 희망의 미소를 보았다.
그 희망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 내겐 정말 커다란 행운과도 같은 일이었다.
(세번째 여행스케치는 월요일에 계속 됩니다)

- 글/사진 아침지기 윤나라






뗄만학교. 때마침 아이들이 학교를 파하고 나오고 있었다.



뗄만 학교의 교장(맨왼쪽)과 장애아 담당 교사(맨오른쪽).
교장선생님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인다.




장애아 교실 입구. 벽에, 탁자에 학생들의 작품을 전시해놓고 있었다.



미니 조각들. 아이들이 만든 작은 찰흙 작품들이 귀엽고, 앙증맞게 보인다.



전시 게시판. 정성스럽게 만들었을 색색의 작품들에서 아이들의 정성이 느껴진다.



장애 교실 게시판에 붙어있던 그림.
표현력이나 뎃생력이 매우 뛰어난 그림이라 다른 몇개의 그림과 함께 눈에 띄어 찍어놓았다.




같은 사람이 그려놓은 그림인 듯해서 찍어놓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우리가 만난 '일림'이라는 장애 학생이 이 그림의 주인공이었다.




'일림'의 동네. 창밖의 불빛에서 온기가 느껴지지만 집안에 들어가보면 냉기가 가득하다.



'일림'과 함께 축구를 하던 동네 아이들.



'일림'의 집 부엌. 궁핍한 살림살이가 일림네 가정형편을 말해준다.



휠체어. 한때는 일림의 다리가 되어줬을 훨체어가 집안 구석에 등을 돌리고 서있다.



'일림'과 인사.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찾아온 손님에게 예를 갖추며 인사하는 일림.
손님의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차려놓은 음식. 이 집으로서는 최상으로 차린 '잔칫상'이다.




경청. 일림에 대해 말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고 있다.
왼쪽부터 기아대책 정정섭부회장, 고도원 홍보대사, 일림, 일림의 어머니.




일림의 어머니. 혼자서 일림등 네아이를 키우며 고생한 흔적이 얼굴에 베어있다.



저녁식사. 왼쪽 두번째(체크무늬 외투)사람이 일림의 수술비 지원을 약속한 김옥렬님.
덕분에 웃음꽃이 피었다.




일림의 웃음. 좀처럼 웃지 않고 마치 화난 듯한 얼굴로 있던 일림의 얼굴이 잠시 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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