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이 미래 지도자 학교' 개원식을 마치고 우리는 바로 이웃 마을로 이동했다.
기아대책에서 진행하고 있는 이른바 'CDP' 후원 대상 아동 집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CDP(Child Development Program)란, 쉽게 말하자면 형편이 어려운 아이와 그 아이를
경제적으로 지원해주고 싶어하는 후원자의 1대 1 결연 프로그램이다.

기아대책기구에서 일찌기 10년전부터 이 CDP 프로그램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18개국 9,200명의
어린이가 후원자와 결연을 맺었다. 키르키즈스탄에도 이번 해부터 100명을 선정,
매달 2만원씩 지원해 줄수 있는 후원자를 찾아 내년 1월부터 결연에 들어갈 계획에 있었다.


CDP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 대상 아이의 집으로 가면서 나는 불현듯 어린 시절의 꿈이 생각났다.
어릴 적 나에겐 포부같은 것이 하나 있었다. 남을 돕는 사람이 되는 것, 그럴 수 있도록
나 자신을 키워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이 없는,
그저 가슴 한 구석에 깊숙히 묻어놓고만 있었던, 구체성을 띠지 않은 작은 꿈이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어려운 사람들만 보면 마음이 너무 아파 뭔가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알수 없는 사명감이 내게 그런 꿈을 갖게 한것 같다.

그땐 그랬다.
그냥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을 해주는 것,
어린 나이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게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무언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돕고나면 나만의 기쁨 저장소에 묵직한 뭔가를 채운듯한 느낌,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혼자서 괜한 미소가 생겨나고 마냥 날아갈 듯 가벼워지는
그런 느낌...그냥 그게 좋았었다.

이번 여행이 내게 가장 특별한 선물같은 경험을 안겨 준 것은 바로 그 어린 시절의 꿈을 되살려주고,
지금 당장이라도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는 점이다.


중앙아시아 도착 첫 날, 첫 가정방문이었던 만큼 나는 설레임 반 호기심 반으로
그 아이의 집에 들어섰다. 한 아이가 보였다. 핏기라곤 전혀 없는 지친 표정의 조그만 아이였다.
그 아이가 CDP 후원 대상으로 선정되어 후원자를 기다리는 일곱살의 '마를레스'였다.

꼬질꼬질한 노란색 털 스웨터에 얼굴엔 병색과 궁기로 가득찬 소년 마를레스는 낯선 외국인들의
갑작스런 방문에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고도원 홍보대사가 그의 어깨를 감싸며 말을 걸어도
그의 표정에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 고도원님이 번쩍 안아올리자 잠깐동안이나마
수줍은 듯한 환한 미소를 보였다.

지난 9월에 학교에 입학했다는 마를레스는 일곱살짜리 치고는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알고보니, 다행히 큰 병은 없지만 영양이 부족해 성장장애를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부모와는 경제적인 이유로 떨어져, 현재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고 있었다.

아이의 모습을 안쓰런 마음으로 한참을 들여다보던 내 눈길이 그의 오른손에 멎었다.
엄지와 집게 손가락 사이가 5센티 정도 찢어져 상처가 났는데도 그대로 방치해, 큰 흉터로 변하고 있었다.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그냥 두면 큰일인데...피부 연고제만 발라줘도 저렇게 되지는 않았을텐데...
마음이 더욱 아려왔다.

이것 저것을 설명하던 외할머니가 우리를 집안으로 안내했다.
집안을 둘러보며 부엌쪽으로 가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부엌에 웬 늙은 할아버지 한 분이 초점을 잃은 퀭한 눈으로 초췌하게 앉아 있었던 것이다.
손님이 들어오는데도 밀랍인형처럼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망연히 앉아 있을 뿐인 그 남자는
아이들의 외할아버지였다.

어두컴컴한 집안으로 들어가니, 세상에!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그 안에는 마를레스 만한 아이들 셋이 더 있었다.
비슷한 몸집의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으니까 마치 옹색한 고아원을 찾아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밖에 나가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아이까지, 다섯명이 그 집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다섯명의 아이들이 그 춥고 어두운 집에서 부모의 보호도 없이, 더 어렵고 힘들어보이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 의지해 그냥저냥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서 '아름다운 인연'이 하나 탄생됐다.
고도원님이 즉석에서 마를레스와 1대 1 결연을 약속했던 것이다. 100명의 후원 대상 아이 가운데
고도원님의 첫번째 선물을 받게 된 아이 마를레스, 마를레스와 고도원 홍보대사와의 만남은 분명
아름다운 인연의 시작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약속은 마를레스 한명에게는
틀림없는 행운이었으나 남아있는 99명의 다른 아이들이 있었다. 그 아이들의
후원자를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 현장에 계시던 정정섭 부회장께서 나에게
"윤실장이 다른 한 아이의 후원을 맡아보는게 어떠냐"는 권유를 해오셨다.
그 자리에서 차마 표현하진 못했지만 은근히 마음속으로 마를레스의 후원을 자처하고 싶었던 난
너무 기뻐서 바로 "할께요. 제가 하고 싶어요." 라고 말씀드렸다. 아, 그 순간 나는 어린 시절의 꿈을
다시 찾은 듯한 기쁨을 맛보았다. 그리고 오랜 동안 비워있던 내 기쁨 저장소에 멋진 선물을
하나 채워넣은 듯한 행복감을 맛보았다.

이제 98명의 아이들이 남게 되었다.
마를레스의 집을 나와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고도원님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윤실장. 남은 98명의 아이들을 뜻이 있는 우리 아침편지 가족들과 후원 결연을 맺을 수 있도록 해주면 어떨까.
나중에는 우리 아침편지 가족 만으로 결성된 별도 후원팀을 만들어 이곳으로 여행도 오고, 자기가
후원하는 아이들을 직접 방문해서 함께 마음과 사랑을 나누는 기회를 가지면...그럼 어떨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게 전율이 왔다. 머리 속에 온갖 그림들이 파노라마처럼 그려졌다.
여러 사람들에게 새로운 기쁨 저장소가 생겨나고, 그 저장소가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 채워지는 환상적인 그림이었다.

나는 다시 어린 시절에 꾸었던 꿈을 생각했다.
우리 나라를 비롯, 어려운 상황에 처한 세계의 많은 아이들이 CDP프로그램 같은 후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 많은 아이들을 다 지원할 수 없는게 현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내 형편이라면, 단 몇 명이라도 나와 인연이
닿는 아이를 더 만날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더 많은 것을 가지지 않은,
더 성공한 사람이 되지 않은 지금이라도 당장 내 꿈을 작게나마 시작할 수 있다고...

그 어떤 특별한 인연으로 고도원님과 결연을 맺게된 마를레스.
그 아이가 나중에 우리의 이 방문을 고마운 기억, 좋은 기억으로 오래 간직하게 되기를 나는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그리고 앞으로, 뜻이 있는 아침편지 가족들의 관심으로 결연의 끈이 닿을지도 모를 제2, 제3의 마를레스가
훗날 자기 몫을 다하는 어른이 되었을 때, 자신의 어린 시절과 같은 상황에 놓여있는 또 다른 마를레스를
만나 그 아이의 손에 난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그 아이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랑은 분명 사랑을 낳을테니까...

(내일 계속 됩니다)

- 글/사진 아침지기 윤나라








마를레스의 동네. 우리네 60년대 시골동네와 같은 모습이다.



동네 아이들. 아이들의 옷차림이며 얼굴 표정에서 순수함이 묻어난다.



집 마당안에 나무로 지어진 창고. 그러나 창고안에 들어있는 것이 별로 없다.



마를레스. 어린 아이인 마를레스의 표정에서 어른보다 더 깊은 수심이 엿보인다.



마를레스에게 말을 거는 고도원 홍보대사. 왼쪽은 마를레스의 외할머니.



마를레스의 오른손에 나있는 상처를 들여다보고 있다. 상처가 꽤 깊다.



마를레스의 집 내부. 햇빛이 들어오는 낮인데도 집안이 어두컴컴하다.



마를레스의 동생들. 가운데 빨간옷을 입은 아이만 여자애고, 나머지는 남자아이들.



마를레스의 외할아버지. 낯선 손님들이 들어오는데도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몇장의 사진이 한쪽벽을 장식하고 있다.



마를레스의 형제들에게 준비해간 인형을 선물하고 있다.



기습뽀뽀. 선물을 받고는 갑자기 일어나 고도원님 얼굴에 뽀뽀세례를 퍼붓고 있는 깜찍한 아이.



함께 동행한 어른들이 아이들을 안아주고 있다. 왼쪽부터 조옥순, 최대원, 외할머니, 정정섭, 고도원님.



아름다운 인연. 후원 결연을 맺은 고도원님과 마를레스가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다.



초저녁 풍경. 키르키즈 시골동네의 하루가 조용히 저물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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