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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4일간의 북한 방문 기간 동안 평양에서 만난 남북의 사람들이
무언의 약속처럼 조심스레 지키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정치적 발언'을
삼가는 것이었다. 특히 '북핵 문제'라든가 현재의 남북 정치 상황 등에 대한 얘기는
일체 나눠지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 방문단과 북쪽 사람들도 서로 자제하며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기껏해야 대동강을 건널 때 '프에블로호'(1968년에 동해상에서
나포된 미국정보함으로 현재 대동강가에 정박해 놓았다)를 가리키며, "저 곳이 조선
시절 미국의 셔먼호(제너럴 셔먼호)가 격침된 곳이라요" 하는 정도의 언급에 머물렀다.

그런 가운데서도 평양에서는 뭔가 '큰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모습이 여러 곳에서 감지되었다. 큰 광장에 모여 집단 무용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라든지, 학생과 주민들이 길가에 잔뜩 나와 화단을 정비하고, 보도블럭을
갈고, 건물 외벽엔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고, 아예 건물 바깥 벽돌을 환한 색으로
바꾸는 곳도 여러 군데 목격되었다.

6.15 공동선언 5주년을 앞두고 벌어지는 것이겠거니 짐작되면서도
북쪽 안내원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넌지시 물었더니 "행사와 관계없이 계획성을
가지고 진행하는 일"이라는 짧은 답이 돌아왔다. 나의 시선이 머문 곳이 매우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지만 아무튼 평양의 거리와 건물이 밝은 빛으로 바뀌며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 나쁜 징조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와서 이 글을 쓰는 사이 반가운 빅뉴스가 터졌다.
우리보다 사흘 뒤 북한을 방문했던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돌아오는 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극적으로 만나 장시간에 걸쳐 대화를 나눈 것이다.
예전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또 다른 감회가 내 몸을 감쌌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북한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북에 대한 체감 온도가
높은 탓도 있겠지만 남북의 대화, 그것도 정부 차원의 책임있는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성수액공장' 준공식을 위해
북한을 방문했던, 나를 포함한 140명의 민간인들로서는 차마 꺼내기 힘들었던
'북핵 문제'등 주요 이슈를 포함하여, 민족의 역사와 장래를 위해 제한없이,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눌 당국자간 만남이 얼마나 필요한 때인가.
또 그들이 나눌 얘기가 얼마나 많은가.
풀어야 할 숙제는 또 얼마인가.

솔직히, 나는 분단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껴보지 못한 세대이기에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이 많이 부족하고, 있다 해도 피상에 머물러 있는 채로 살아왔다.
짧지만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서 드는 생각은 우리네 젊은 사람들의 남북 교류가
더욱 왕성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우리 젊은 세대가 해외로 나가 여행하고
경험하고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북한을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주저말고 얼른 잡아주기를 간절히 희망해본다. 시간과 돈이 있으면 얼마든지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많이 있지만, 그에 앞서 북한 방문을 한번쯤 꼭
해봐야겠다는 마음을 먹는 것도 대한민국의 젊은이로서 반드시
가져볼만한 꼭 필요한 꿈이라고 생각한다.

3박4일의 짧은 여정을 마치고 다시 남쪽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날.
아침에 잠깐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이내 개였고, 평양의 6월 태양은 거리 곳곳의
붉은 글씨만큼이나 붉고 강하게 내리쬐며 빛나고 있었다. 마지막 날이다 보니
아무래도 가벼운 일정이 남아 있었다. 버스에 올라 북한 미술의 산실이라 할 수 있는
'만수대 창작사'의 미술작품 전시관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짧았지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 북으로의 여행은 내게 많은 감흥을 주었고,
무엇보다 이 버스 안에서, 내 생애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장 특별한 추억'이 생겨났다.

북을 떠나는 날 하루 전날인 6월9일.
이 날은 앞서 여러 번 적은 대로 기아대책과 우리민족서로돕기 모임이
북쪽과 함께 손을 잡고 만든 제약회사 '정성수액공장' 준공식이 거행된, 참으로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중요한 날이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이 날은 나의
생일이기도 했고, 내 생애 가장 큰 수술을 하고 엄청난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하던
날로부터 정확히 한달이 지난 날이었다.

갑자기 버스 속에서 '깜짝쇼'가 벌어졌다.
하루 지난 나의 '생일 축하 파티'가 누군가의 소개로 시작된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이 많이 들었던 5조 버스 안의 모든 분들이
마치 자기 생일인 양 기뻐하며 진심어린 축하를 해주셨고, 어디서 구해왔는지
생일 케익 까지 준비하신 김승연 목사님은 '축복 기도'로 나를 감격하게 만드셨다.
이윽고, 최동훈 팀장의 깜짝선물인 '북한제 생일카드'가 내 손에 건네졌을 땐
안으로 흐르는 눈물의 짭짤한 맛을 봐야만 했다. 그 생일 카드에는 3박4일동안
편안하고 의미있는 여행이 될 수 있도록 친절하고 따뜻하게 우리의 안내를 맡아주신
북측 안내원 네 분의 축하 인사말이 적혀 있었다. '더 이뻐지라'는 문구부터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 그리고 '민족화합의 길을 앞당길 아침편지의
꽃이 되어달라'는 환상적인 멘트까지, 내 생애 받기 힘든 참으로
소중하고 귀한 선물을 받게 되었다.

자기 생일은 누구에게나 특별한 날이지만, 내 생일이 나 한 사람의
개인적인 기쁨을 떠나 마치 그 곳에 모여 있는 남, 북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예정에 없던 특별 이벤트 역할을 해낸 것 같아, 이제껏 지내왔던 그 어떤 생일보다도
더욱 특별한 날이 되어버렸다.

고마움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과분한 축하를 받으며
남쪽으로 향할 비행기를 타기 위해 평양 시내를 뒤로 하고 순안 공항으로 향했다.
방문 기간 중에 북쪽 참사관 안내원으로부터 배운 노래 '다시 만나요'를 반복해서
부르며 공항에서의 아쉬운 이별을 노래로 대신했다.

"백두에서 한라로, 우린 하나의 겨레, 헤어져서 얼마냐, 눈물 또한 얼마이더냐.
잘 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 가시라 다시 만나요, 목메어 소리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

소리없는 눈물이 노래와 함께 흘러나왔고, 언제 다시 만날 지
기약없는 이별은 그 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금 아픔을 안겨주었다.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또 다시 정확한 55분.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런 저런 감회와 생각의 파편들이 빠른 속도로
내 머리 속을 넘나들었다. 통일은 반드시 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 통일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런
두서없는 생각 중에 한 가지 깨달음이 왔다.

모든 것에 앞서 남북이 서로 만나고,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깨달음이었다. 그렇다. 남과 북은 무조건 많이 자주 만나야 한다.
그래야 서로를 알게 된다. 알아야 서로 이해하게 되고, 서로 이해해야 믿음도 생겨나고,
대화도 통일도 가능해질 수 있을 것 아닌가.

'신뢰'와 '믿음'의 기반은 또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남북이 서로 만나 약속을 하고, 그 크고 작은 약속들을
신의있게 지켜나가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 아닌가, 이를테면 5년전
'6.15 공동선언'이라는 역사와 민족 앞에 행해진 대(大) 선언도 "서울 답방을
하겠다"고 약속했으면 그 약속이 지켜져야 믿음이 생기는 것이고, 그래야
그 다음의 약속도 유효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덧 비행기가 인천 상공을 내리고 있었다. 인천의 6월 햇빛도
평양과 마찬가지로 뜨겁고 강렬했다.

이번 방북기를 마치면서 소원하는 게 한가지 생겨났다.
내가 이번 방북을 통해 가장 절실하고 안타깝게 느꼈던 점이기도 하다.
그것은, 통일을 바라고 원하는 우리 윗세대의 어르신들이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통일까지는 안되더라도 적어도 북녘 땅을 마음대로 방문할 수 있는 길이 하루 빨리 열리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나의 어머니도 북에 두고온 언니 찾기를 포기하고 사신 지 오래다.
그렇게 불가능하다 생각하며 그리움을 숨기시고 아픔을 삭이며 살아가는 수많은
'나의 어머니'들이 절대 포기하지 마시길, 희망을 잃지 마시길, 그러기 위해 제발
건강하게 사시길, 간절히, 간절히 바래본다. 아울러 정말 뜻밖의 방북 기회를 얻어 남긴
부족한 나의 글이 미약하나마 북에 연고를 두고 계신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희망을
드릴 수 있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으로 글을 맺을까 한다.

'다시 만나요.'
결코 포기하지 말고...
절대 희망을 버리지 말고...

- 끝 -

글 / 아침지기 윤나라 실장
사진 / 윤나라 실장, 최동훈 팀장


 
스케치1 스케치2

옥류관.
평양을 방문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꼭 한번은 찾아가는 유명한 냉면집이다.



2층 식당 입구로 올라서자, 종업원들이 물수건을 나눠주고 있다.



식당 입구. 문 위쪽에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방문 날짜가 적혀 있다.



옥류관의 상차림. 냉면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전채 요리.
'오징어'를 북쪽에서는 '낙지'라고 부른다.



평양의 또 하나의 명물, 녹두전.
북에서는 '젓가락'을 '저가락'으로 불렀다.



이것이 바로 옥류관의 '평양 랭면'이다.



'쟁반 랭면'.



'쟁반 랭면'을 맛있게 먹고 있는 방북단.



옥류관의 발코니는 바로 대동강과 접해 있다.
5조 일행이 점심 후 함박웃음을 지으며 단체 사진을 찍었다.



대동강 바람을 맞으며...
우측에 보이는 섬이 '능라도' 이다.



옥류관 외부의 모습.
식당이라고 하기엔 매우 큰 규모이다.



방북단이 탑승한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드는 평양 시민들.
이들은 옥류관 냉면을 먹기 위해
140명의 남측 사람들의 식사가 끝나기를 꽤 오랜 시간 기다렸다고 한다.
스케치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