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28일 오늘의 아침편지 출력하기 글자확대


기쁨

항상
잊지마십시오.
기쁨은
그저 원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처럼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 렙베 나흐만의《빈 의자》 중에서 -



* 코미디언을 통해 얻는 웃음과 기쁨도 값진 것입니다.
딱딱하고 메마른 삶에 좋은 활력소가 되어주니까요. 그러나
그 웃음과 기쁨은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주어진, 만들어진 것일 뿐입니다.  자기 안에서,  생명처럼
솟아오르는 것이어야 진정한 자기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아침편지는 지난해 11월9일에 보내드렸던, 앵콜 메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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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같은 기독교 찬송가를 올렸으면,
찬불가도 함께 올려야 할 것 아닌가. 아침편지를 특정 종교의
선교용으로 삼을 생각인가>에 대하여--------------------

지난 3월29일 <미니 간증>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성경과 찬송은 그
뿌리이자 중심입니다. 지금도 저는 돌아가신 제 어머니가
생전에 가장 좋아하셨던 찬송,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죄짐을 풀었네" 를
들으면 뜨거운 감동이 제 마음에 차오르곤 합니다.

불교는, 고교 시절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불타 석가모니의 인생 고행 역정과 가르침에 매료된 뒤로,
제 삶에 많은 깨우침과 깊은 성찰을 선사한 종교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불경이나 스님들의 책을 즐겨 읽고 아침편지에도 자주
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찬불가는 저에게 생소합니다. 저의
생활의 울타리 안에 깊이 들어와 녹아 있지 못합니다.

불경이나 스님의 책을 아침편지에 많이 인용하면서도
찬불가를 올리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찬불가가 제 안에 충분히 녹아있지 않으면서도,
단지 평면적 균형만을 위해 찬송가를 올렸으니까
찬불가도 함께 올려 드린다면 그것은 저 자신에게
정직한 태도는 아니며,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설사 일시적 감흥을 준다 해도 그건
결코 진실이 될 수 없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아침편지는 좋은 친구 사이가 그렇듯이
힘들면 힘든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함께
위로하고, 함께 생각하며, 함께 살아가는, 행복한
사람 관계의 좋은 매개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어쩌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같은 찬송가가
아침편지에 올려지거든, 아, 저 사람이 지금 뭔가 힘든
일이 있구나, 뭔가 목말라 있구나, 누군가에게 심히 매달리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시고 마음을 함께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그마저 불편하시면 참으로 넓게 열린 마음으로, 그날
하루만은 잠시 길을 비켜가 주시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침편지가 특정 종교 선교용으로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그럴 자격과 능력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한 축구처럼, 아침편지
또한 이념도 종교도 국경도 훌쩍 넘어서, 인류가 남긴 최고의
지적 재산이자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다양성과 풍요함을 가진
책을 매개로 하여, 매일 아침 그저 상큼하게 목을 축이고 새
힘을 얻는 맑고 시원한 옹달샘으로 남아 있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옹달샘은 누가 누구에게 강제로
떠먹이는 샘물이 아닙니다. 그 어떤 의무 사항도 없습니다.
좋은 사람들이 서로 릴레이로 만나 마음을 함께 나누며
함께 가꾸어 가는 작은 행복의 맑은 공간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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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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